안녕하세요? 오늘은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를 읽어드릴게요. 여러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 글을 쓰는 지금부터 설레네요. 몇 번은 읽은 책입니다.
1. 개인에 대한 단상
요새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 '개인'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내용이 많습니다. 유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SNS의 발달과 급격한 세계화로 인하여 그야말로 어릴 때나 교과서에서 보던 '지구촌 시대'라는 것이 절실히 느껴지는 요즘인데요.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나 자신보다는 화려하고 다양한 주위 환경에 눈을 돌리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인간관계가 복잡다단해지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철학적 사유나 명상보다는 거센 주위의 물결에 휩쓸리곤 합니다. 그렇다보니, 스스로 심지를 굳게 세우고 이를 통해 행복한 삶을 개척하라는 사상이 힘을 얻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기계발서 뿐이 아니라 인문학 서적에서도 개인을 강조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주위의 고난에도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은 비단 나 스스로의 결심과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어 아나키스트가 될 때가 아닌, 사회 속에서 어울릴 때 찾아옵니다. 균형이 중요하지요. 이런 생각들이 비단 요새에만 대두된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학파에서도 자리에 맞는 역할수행으로 얻어지는 평화, 적당한 정도의 욕구실현에 따른 내적 행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공자는 '군자가 머무는 곳에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했고, 니체는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라며 나를 해치지 못하는 것들은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요새 철학사상은 옛날에 나온 것들의 변주라는데, 어쩌면 지금의 시대가 이런 개인의 행복을 요구하는 사상을 골라내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 심리학에 근거하여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를 통해 제시됩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의 만담을 담은 「대화편」이 생각납니다. 아들러 심리학을 처음 접하면 의문이 잔뜩 들고, 마구 비판하고 싶어집니다. 독자는 청년의 입장에서 철학자와 대화하며, 그에게 설득당합니다. 그러니 「미움받을 용기」는 질리지 않고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은 '개인 심리학'이라고도 합니다. 개인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지금 마음 먹기에 따라 스스로 행복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함께 살펴봐요.
2. 용기의 심리학
「미움받을 용기」의 이야기에 앞서, 아들러 심리학과 고전 정신분석학과의 차이를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리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칼 융은 '빈(Wein) 정신분석학회'를 차려 고전적인 심리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심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은, 실제로 과학적 연구방법을 따라 지금 한 사람의 정신과 심리상태의 원인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이렇습니다.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만족을 얻는 아버지가 있다면, 분명히 과거의 어떤 사건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어릴 적 똑같이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아 내적으로 습관화가 되었든지, 학창 시절 유약한 몸으로 따돌림을 당해 지금 가족들에게 남성성을 드러내며 인정받고 싶어하든지요. 또는 이혼 가정의 어린이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떠나 아버지 손에서 자랐고, 그러다 보니 사랑이 부족합니다. 애정 결핍이 생기고, 성인이 됐을 때 연인 관계에서 수없이 집착하며 실패를 겪게 됩니다.
이렇게 과거의 사건이 '원인'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정론이자 「원인론」입니다. 그리고 원인론적 사고방식은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정식을 나름 해석하려고 할 때, 그리고 나의 현재 상태를 분석하려고 할 때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지."라며 이유를 따져 묻고는 합니다. 아들러 심리학은 바로 이러한 원인론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합니다. 애초에 아들러가 기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반기를 들고 세운 심리학이 아들러 심리학이기도 하고요.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은 명백한 학문이고, 과학적 연구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러면 정신 속의 원인-결과에 대해 과학적 사고를 적용시킬 수 있어야겠지요. 예를 들어, 이혼 가정에서 자란 모든 어린이들은 애정 결핍이 있고 추후 연애 관계에서 힘들어야 합니다. 또,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고 자란 모든 남자아이들은 모두 폭력적인 가장이 되어야 합니다. 또, 과거에 이별의 고통을 심하게 겪은 모든 청년은 추후 가정에서 불안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에 겪은 사건이 모두 인간에게 동일한 결과를 불러오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내가 어떠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내가 그 심리 상태에 놓이기로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연인 관계를 맺기 힘들어 하는 것이 과거에 이혼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가 인간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스스로 연인 관계를 맺기 힘들어하는 마음을 먹기로 정한 것입니다. 과거의 이혼 가정에서 자란 것은 그저 변명일 따름입니다. 즉, 인간 관계를 피하기 위한 목적이 있어서 지금 이 현재를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목적론」이라고 하는데, 기존의 「원인론」적인 고전 심리학과 가장 차별화 되는 부분이며, 아들러 심리학의 시작입니다.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은 일견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지금 힘든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 나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니, 누구는 돈 많고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나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며 해외여행도 마구 다니는데, 그렇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온갖 불행을 정면으로 맞고 자란 내가, 스스로 불행을 결정했다니? 심지어 이런 '환경'은 내가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아들러를 말합니다. "미안한데, 네가 뭐라고 하든지 지금 불행하기를 결정한건 「너」야." 아! 이렇다 보니 아들러 철학을 처음 접한 사람들, 「미움받을 용기」를 읽기 시작한 사람은 깊은 분노가 마음 속에서 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미움받을 용기」와 아들러 선생님의 말을 조금 더 들어봅시다. 여기 섭씨 18도의 우물물물이 있습니다. 이 물은 외부 환경이 어쨌든, 언제나 18도입니다. 한여름에 이 물을 마시면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고, 한겨울에 마시면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우물물을 과거의 사건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물물의 온도와 마찬가지로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물물을 시원하게 느낄 것인지, 따뜻하게 느낄 것인지는 우리의 판단에 달려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와 현실의 상황은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이를 인식하는 나의 마음은 주관적입니다. 이를 좀더 개념화하면, 세계는 객관적이지만 세계의 인식은 주관적입니다. 그리고 인식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들러 심리학의 「목적론」이 의미가 있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원인론」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되면 "과거의 아픈 기억이 나를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힘들게 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잡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아픈 기억"은 바꿀 수 없습니다. 원인론적인 사고방식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목적론은 어떻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거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 내고 있어." 내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현실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은 주관적이기에, 바꿀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도식 속에서 아들러 심리학은 세계는 아주 간단하며, 내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 당장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중요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좋아요, 목적론적인 사고를 백번 양보해서 인정했다고 쳐요. 힘든 일은 지나간 과거의 일일 뿐이고, 불행은 내가 택한 것이라고요. 뭐, 내가 어떤 일을 겪었던, 어떤 상황에서 자라왔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내가 생각만 바꿔 가지면 현재에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겠어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아래에는 「미움받을 용기」에서 제시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꼭 책을 통해서 접해보세요. 어쩌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버리세요. 그리고 ② 나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세요. ③ 모두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과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충실하세요. ④ 마지막으로, 내가 공동체 속에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공헌하세요.
자, 먼저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했다'는 말부터 시작해봅시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고를 쳐서 회사에 출근하고 싶지 않아진 상황을 떠올려 봅시다. 이 경우엔 일 자체가 싫어진 것이 아닙니다.(아, 물론 출근이야 맨날 하기 싫지만요.) 동료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 상사에게 쿠사리를 먹을 것이 두려워서 출근하기 싫은 것입니다.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갇혀버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엄청난 쓸쓸함과 외로움 속에서 고통받더라도, 이는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급작스레 떨어져 버렸기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우주공간에 유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심적 고통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겪는 현실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인간 관계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행복으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그 첫 번째로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인정 욕구'를 버리고 「과제의 분리」를 할 것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항상 신경쓰고,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립니다. 또는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만족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면 다시 자괴감에 빠집니다. 이러다 보면 우월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권위를 빌려오든지, 과거의 영광을 내세우든지 하며 거짓된 우월감을 얻고자 하게 됩니다.
아들러는 이렇게 타인으로부터 열등감을 느끼고, 우월성을 느끼고자 하는 '인정 욕구'를 부정합니다. 말인 즉슨,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나의 과제가 아닌 「타인의 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제의 분리」는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입니다. 이 과제의 분리는 추후 이어질 자기 수용, 타자 신뢰로 나아가 아들러 심리학의 최종 목표인 타자 공헌으로 나아갑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 가치는 나의 인식에 달려있을 뿐,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우물물의 온도는 항상 일정하지만 이를 차갑거나 뜨겁게 인식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남이 해야 할 일을 분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인식하는 눈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해 훌륭한 직업을 갖길 원하고, 자식을 학원에 보내고 공부를 많이 하라고 독려합니다. 그리고 헛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하고 훈육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인생은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자식의 과제입니다. 부모가 할 일은 자식의 과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언제나 옆에 있을 것이라는 지원자의 입장에 있으며 용기를 부여하는 것 뿐입니다.
두 번째로 타자 공헌입니다. 이는 곧 아들러가 제시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행복은 「공헌감」입니다. 즉, 내가 타인에게 공헌하고 있다는 인식만이 인생의 행복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나 행복이 아닌, 우리가 도달해야 할 가장 궁극적이고 상위인 행복이라고 생각해야 할 듯합니다. 이렇게 '타자 공헌'으로 얻을 수 있는 공헌감은, 자원봉사나 기부 등으로 나타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이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서 존재함으로서 남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앞서 말했듯, 「과제의 분리」에 따라 나의 존재와 행동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바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타인의 과제입니다. 그러니 공헌감은 나의 사고전환으로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공헌감이 행복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요?
이 타자 공헌은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자 공헌은 자기 수용과 타자 신뢰를 거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먼저 자기 수용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현실에 안주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들러 철학은 남과의 비교가 아닌 나 스스로와 비교할 것을 권하며, 언제나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것을 권합니다. 자기 신뢰는,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되 바꿀 수 없는 나의 모습은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스토아 학파가 연상됩니다. 예컨대, 시험 점수가 60점인 내가 있습니다. 이 경우 "나는 100점 짜리인데 운이 안좋아서 60점을 맞은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신뢰가 아닙니다. 그 보다,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60점을 맞았네. 그래도 괜찮아. 더 노력해 보지."라고 말하는 것이 자기 신뢰이자, 수용입니다.
타자 신뢰는 이런 자기 신뢰가 이루어 진 뒤에 성립합니다. 타인을 적이 아닌 친구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과제의 분리가 일어나고 내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나를 힘들게 하고 배신할지언정 일단 친구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만일 타인을 적이자 경쟁 상대로 인식하게 된다면, 나의 생각과 타인의 판단에 휘둘리며 과제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고, 자신을 불신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타인을 먼저 신뢰할 수 있냐고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신뢰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이렇게 자기 신뢰와 타자 신뢰가 성립된 후에 비로소 타자 공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됩니다.
3. 행복한 삶을 향하여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행복이란 공헌감"이라 정의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당장 닥친 현실의 문제를 벗어나는 것은 「과제의 분리」로 충분합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관계의 문제고, 내가 지금껏 인간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써왔던 것이 사실은 나의 과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정작 나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할 지는 다른 사람의 과제였던 것이지요.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할 지라도, 내가 과거의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있더라도 내 과제는 지금 내가 처한 이 자리에 대처할 수 있는 것들 뿐입니다.
하지만, 당장 현실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은 막연한 일입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그 행복의 정체를 공헌감이라 밝힌 것이고요. 이런 공헌감은 타자 공헌으로 얻을 수 있는 주관적인 감각인데, 「공동체 감각」이라는 개념 위에서 가능합니다. 공동체 감각은, 나는 내 세계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속의 한 일원이라는 감각입니다. 단순하게는 '나와 너'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적인 관계, 교우 관계, 사랑의 관계부터 학교, 직장, 동네, 우리 사회, 대륙, 지구, 나아가서는 우주와 미생물까지를 포괄합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느껴지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는건 어떤가요? 내가 학생으로서 학교에서 교사와의 관계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는 교사-학생의 관계에서 힘들어 하지만, 더 큰 공동체 감각으로는 대한민국의 동등한 시민이자, 지구적으로는 같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그리고 학교 외에 다른 공동체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연인 관계가 깨져 힘들어하고 있다면 어떤가요? 내 인생의 전부였던 것 같은 애인이 이제는 없지만, 더 큰 공동체에서는 다른 수많은 관계들이 있습니다. 공동체 감각은 모든 관계가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단순히 하나의 인간관계에만 주목하여 인생의 행복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정체인 공헌감은 하나의 공동체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공동체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와 지구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며, 인정욕구를 버리고 '과제의 분리'를 하라는 부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표하게 되었으나, 타자공헌과 '공동체 감각'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두 번, 세 번 읽으며 이러한 공헌감에 대하여 서서히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글에서 개념을 거칠게 요약해 다루었지만, 「미움받을 용기」만큼은 직접 읽으시며 청년이 되어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대하는 새로운 시야를 선물해주는 「미움받을 용기」, 일독을 권합니다.
다음 글은 아무래도 '아들러 철학을 읽는 밤'을 읽어드릴 듯합니다. 아님 말구요. 이번 시간은 여기까지 할게요.
20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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