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능력주의와 기회의 평등에 대한 착각을 정리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학력주의와 그 대안으로써 어떤 공공선을 추구해야 하는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지난 글
2021.07.30 - [2. 책을 읽어드려요/인문교양서] - [서평] 공정하다는 착각 (1)
2. 능력주의의 선봉장, 학력주의
샌델 박사는 하버드 대학에서 1980년부터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근 40년 동안 여러 나라의 수재들이 하버드 대학으로 입학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함께 수업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나타나는 학력주의에 대해 다양한 통계와 본인의 경험을 섞어서 설득력있게 이야기합니다. 학력주의는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두 부분을 핵심 주제로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는 능력주의 그 자체와 능력주의의 병폐(즉, 기회의 평등에 대한 착각)입니다. 앞선 글에서 말씀드렸지요. 두 번째는 다름 아닌 학력주의입니다. 학력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첫째로, 학력주의는 능력주의를 강화하며, 이 능력주의는 다시 학력주의를 강화합니다. 즉 악순환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둘째로, 이 학력주의는 한국에서도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미국 이상으로요. 한국을 중심으로 학력주의와 능력주의의 연결고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학력주의와 능력주의의 되먹임(피드백)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학력주의와 능력주의는 본질적으로 유사합니다. 학력 또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또, 우리 마음 한 켠에는 "저 학생 서울대생이라고? 엄청 성실하고 착하겠네."와 같은 생각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학력이 능력 뿐이 아니라 좋은 성품을 대변한다는 사상입니다. 능력주의 사회 아래에서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학력을 가진 사람 또한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생각됩니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사상 하에서 학력주의는 더욱 정당하게 느껴집니다. 누구나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어린이는 누구나 의무 교육을 이수해야 합니다. 또, 학교에서는 같은 교육과정 아래서 꽤 훌륭한 선생님들과 수업합니다. 학원에 등록할 때에도 생김새나 계급(?)등으로 제한받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학력주의 속 기회의 평등에 대한 착각은, 능력주의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첫 번째 글에서 함께 살펴보았듯, 좋은 능력을 배양할 기회는 사실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학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유복한 가정환경 아래에 태어난 대치동의 어린이와, 다문화 인구 밀집 지역에서 편부모 가정 아래에 태어난 어린이는 결코 동일한 기회를 제공받는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실 평등하지 않은 학력주의는 입시 시장에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교육의 기회를 충분하게 제공받지 못한 어린이들은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기 어렵습니다. 이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학원에 다닐 수도, 고액과외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수능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잘 사는 집 애들이 소위 'SKY'라고 불리는 좋은 학교에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입학합니다. 못 사는 집 애들은 좋은 학교에 낮은 비율로 입학합니다. 더욱 심각한 점은, 이런 '기회의 평등'이 입시 공부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 수리, 외국어 등의 능력만 평가하니 다른 재능을 가진 어린이들은 기회를 얻기 힘듭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좋은 능력'을 가져야 얻을 수 있는 직업, 달리 말하자면 높은 소득과 명예를 보장하는 직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높은 학업 수준을 가지고 있어야 고귀한 직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의사, 변호사, 검사 등 '사짜'직업이 그러합니다. 건설업, 운송업 등은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직업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해서 얻을 수 있는 직업보다 귀히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은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좋은 직업'을 얻은 사람은 또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들은 책을 많이 읽고 여유있으며, 지적인 부모님과 유복한 가정생활을 보냅니다. 그리고 좋은 교육 환경 속에서 높은 성적을 내고, 좋은 대학에 입학합니다. 반대로 '안 좋은 직업'을 가진 부모님에게 태어난 아이는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받지 못합니다. 학습된 무기력에 빠집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힘들며, 결국에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도태됩니다. 이것이 학력주의와 능력주의 사이의 되먹임입니다.
학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좋은 학력'이 차별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능력을 얻을 기회, 풍족한 교육을 받을 기회는 우연찮게 정해집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부모님이나 가정 환경, 사회 환경을 선택할 수 없듯이요. 그리고 동일한 환경에서 같은 노력을 들인다 하더라도 성격과 재능, 예상치 못한 행운과 불운 등으로 누구나 다른 결과를 내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생득적인 어떤 것'으로 급을 나누는 것을 혐오합니다. 외모, 재산, 인종 등으로 "이 사람은 저 사람보다 돈이 많으니 훌륭한 사람이야"라든지, "저 사람은 흑인이니까 능력이 없을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지요. 하지만 과연 '학벌'과 '능력'은 여러분의 100%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요? 학력주의와 능력주의에 기초한 차별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3. 진정한 평등과 공정을 찾기 위한 첫 걸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능력주의가 병폐가 있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 말고 더욱 평등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어? 자유주의, 시장경제 아래에서는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잖아. 어려운 사람이 있지만 누구나 '노오오력'을 하면 되기는 된다는 거야." 이러한 생각은, 우리 사회가 어찌되었든 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적 이동성이 보장이 되는 사회라는 점을 듭니다. 귀족주의와 달리요. 이에 반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는 능력주의 사회는 사실 귀족정 사회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이동성이 보장되지 않으며,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실패감과 모멸감을 준다는 점을 꼬집는 것이고요.
둘 다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꼬리를 물고 같은 논쟁만 반복되는 것이고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답은, '평등의 정의'를 새로 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회의 평등'에서 나아가 '존재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속에서 핵심 가치가 되었던 '기회의 평등'이 사실은 사람의 계층을 나누는데 일조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을 비참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능력이 뛰어나야만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좋은 직업'으로, 공부를 안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직업이 '나쁜 직업'으로 여겨지는 사회 풍토가 잘못입니다. 음악하는 사람을 "딴따라"로,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노가다꾼"으로 말하고, "공부 안하면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한다"라며 노동의 가치에 계급을 매기는 사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존재의 평등'이란 곧 모든 일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기회가 다르게 주어진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높은 능력이 곧 '선하다'라고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나아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기른 능력으로 얻은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이다'라고 여겨져서도 안됩니다. 돈을 많이 받는 직업이 훌륭한 직업이 아닙니다. 이는 우연히 수요와 공급이 만난 시장 가치로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말로만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점을 드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든 일이 존엄하다고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변화해야 합니다. 능력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일의 존엄성에서 나아가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 '나쁜 사람', '한심한 사람'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는 사회의 분열을 초래합니다.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심, 다문화 사회에 대한 반발심, 포퓰리스트의 등장 등이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 왔고,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서. 지금까지 기다려 왔어.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한심하게 살아야 하지? 그리고 애먼 다른 사람이 내가 가져야할 것을 빼앗아 가는 거지?"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리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평등은 모두가 같은 월급을 받아야 한다든가, 재산이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든가 하는 수치적인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직업마다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모든 인간과 일이 존엄하다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말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공선이자, 시민적 가치입니다.
우리 사회의 공정하다는 착각에 일침을 가하는 책이었습니다. 미국 사회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우리 사회도 능력주의, 학력주의가 만연하니 몰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기회의 평등에서 나아가 일과 인간의 존엄함, 노동의 가치를 인식해야 함을 역설하는 책. '공정하다는 착각', 일독을 권합니다.
2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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